“지도 위 경계와 실제 생활권의 불일치, 행정구역의 모순”은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공간이 행정이 정한 선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행정적 경계는 선명하지만 생활은 훨씬 유연하고 흐릿한 경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1. 종이 위 선과 현실의 차이, 행정구역의 태생적 한계
지도에 그어진 행정구역의 경계선은 명확해 보인다. 어느 지역은 ○○구이고 어느 마을은 △△시로 구분되어 있다. 하지만 이 선들은 실제 주민들의 생활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행정구역은 주로 효율적 관리, 정치적 구분, 혹은 역사적 배경에 의해 정해졌다. 조선시대의 읍치나 군현의 범위를 기반으로 하거나 근대 이후 행정편제 개편 과정에서 인구 균형과 행정 관리의 편의를 위해 선이 그어진 경우가 많다. 그러나 행정이 필요로 하는 경계와 주민들이 살아가는 생활권의 범위는 동일하지 않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시에 거주하지만 직장은 바로 옆 △△시에 있다. 장을 보는 시장, 자녀가 다니는 학원, 병원과 문화 시설은 모두 다른 행정구역에 속할 수 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주소지에 적힌 행정구역이 아니라 실제로 이용 가능한 생활 반경이다. 이런 점에서 행정구역은 법적, 제도적 관리를 위한 최소 단위일 뿐 인간 생활의 자연스러운 범위를 담아내기에는 한계가 있다.
더욱이 행정구역은 일단 설정되면 쉽게 바뀌지 않는다. 정치적 이해관계, 주민 반발, 복잡한 법적 절차 등이 얽혀 있어 조정이 어렵다. 반면 생활권은 매우 유동적이다. 교통수단이 발달하면 통근·통학 범위가 넓어지고 새로운 상권이 들어서면 생활권은 즉시 확장되거나 이동한다. 이처럼 행정구역과 생활권은 본질적으로 속도가 다른 체계를 가지고 있다. 지도 위의 경계는 고정적이지만 주민들의 생활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동적 흐름 위에 존재하는 것이다.
2. 경계선에 사는 사람들, 불편과 모순의 일상
행정구역과 생활권의 불일치는 특히 경계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불편으로 다가온다. 같은 마을처럼 보이지만 행정구역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다른 행정 서비스를 받아야 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예를 들어, 어떤 아파트 단지는 주소상 ○○시에 속하지만 길 하나 건너면 △△시다. 주민들은 생활적으로 같은 상권과 문화권을 공유하지만 쓰레기 수거 규정, 주차 정책, 교육 행정, 세금 부과 방식은 서로 다르다. 같은 건물에 사는 주민이더라도 행정구역에 따라 다른 시청에 민원을 넣어야 하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교육 문제에서도 이러한 모순은 두드러진다. 자녀가 다니고 싶은 학교가 바로 길 건너편에 있지만 행정구역이 다르다는 이유로 입학이 제한되는 경우가 있다. 또 의료 서비스에서도 주소지 기준으로 관할 보건소가 다르기 때문에 생활권에서 가장 가까운 병원을 이용하는 데 행정적 제약이 따르기도 한다.
교통 인프라에서도 불일치는 나타난다. 지하철역이 행정구역 경계에 위치할 경우 역 이름이나 노선 운영 주체를 두고 지자체 간 갈등이 발생하기도 한다. 실제로 주민들은 어느 구에 속하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빨리,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데 행정 경계는 종종 그 흐름을 끊어버린다.
이러한 불일치는 주민들에게 단순한 불편을 넘어 소속감의 문제로 이어지기도 한다. 같은 생활권을 공유하면서도 서로 다른 행정 단위에 속한다는 사실은 지역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 결국 지도 위 경계선은 현실에서는 불필요한 장벽이 되기도 한다.
3. 생활권 중심으로 본 행정, 새로운 패러다임의 필요성
행정구역이 생활권과 어긋나면서 생기는 불편은 단순히 개인적 문제를 넘어 사회적 비효율을 낳는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일까? 최근에는 생활권 중심의 행정 패러다임이 주목받고 있다.
예를 들어, 대도시권에서는 이미 행정구역을 넘어선 광역 생활권 개념이 활용되고 있다. 수도권을 예로 들면, 서울에 거주하면서 인천국제공항을 이용하고 경기도에 직장을 두는 것은 흔한 일이다. 행정구역은 셋으로 나뉘지만 실제 주민에게는 하나의 생활권으로 인식된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기 위해 광역교통망, 광역 상하수도 사업, 광역 환경 관리 같은 행정 협력이 이뤄지고 있다.
또한 디지털 시대에는 행정 서비스의 물리적 경계가 더욱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온라인으로 세금 신고, 각종 민원 접수가 가능해지면서 주소지 행정구역의 제약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교육·복지·문화와 같은 서비스는 여전히 행정구역에 종속되어 있어 이를 생활권 중심으로 개편할 필요가 있다.
해외 사례를 보면 일부 국가는 행정구역보다 생활권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운영한다. 예컨대 프랑스의 레지옹 제도는 행정구역보다 실질적인 지역 생활과 경제권을 고려해 설정되었다. 일본 역시 도도부현 단위를 넘는 광역 연합을 통해 생활권 단위의 협력 모델을 확대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필요하다. 행정구역 경계는 법적으로 유지하되 생활권 중심의 행정 협력 모델을 강화하면 주민 불편을 줄이고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결국 지도 위 경계와 실제 생활권의 불일치를 해결하는 길은 고정된 선을 고집하기보다는 유연하게 현실을 반영하는 행정 체계로 전환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