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경계선 위에 사는 사람들. 구와 구 사이의 일상”은 단순한 행정 구분선 너머, 실제 주민들의 삶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 지도 위의 선은 종종 불편함과 가능성을 동시에 만들어내며, 그 속에서 특별한 도시 문화를 탄생시킨다.
1. 지도 위 선이 현실이 되는 순간
우리가 흔히 보는 행정구역 지도에는 여러 개의 경계선이 그어져 있다. 서울만 하더라도 25개의 구가 있고 그 사이를 나누는 선들이 지도 위에는 단순한 검은 줄로 표시된다. 하지만 이 경계선이 실제 생활 속에서는 단순한 선을 넘어 주민들의 일상과 정체성에 깊이 스며든다. 구와 구의 경계에 산다는 것은 곧 행정적, 문화적, 심리적으로 두 세계를 동시에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서울 강남구와 서초구의 경계 지역에 사는 주민들은 도보 5분 거리 차이로 소속 구가 달라진다. 이로 인해 주소지에 따라 아이가 다니는 초·중·고등학교가 달라지고 부동산 가격의 평가 기준도 달라진다. 같은 아파트 단지라도 건물이 어느 구에 속하느냐에 따라 세금, 교육 혜택, 심지어는 선거구까지 달라진다. 지도 위에 단순히 긋는 선이 실제 삶 속에서 구체적인 제도와 규제로 다가오는 순간이다.
이러한 경계의 특수성은 특히 교육이나 의료 같은 생활 서비스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경계선 바로 옆에 더 가까운 초등학교가 있어도 주소지가 다른 구라면 배정되지 않는다. 주민센터나 보건소, 구청에서 제공하는 복지 서비스도 마찬가지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시설보다 차로 30분 걸리는 자기 구 소속 시설을 이용해야 하는 아이러니가 생긴다. 이는 경계선이 단순히 행정적 구분이 아니라 일상의 동선을 바꾸는 지리적 장치임을 보여준다.
또한 구 경계선은 주민들의 ‘소속감’에도 영향을 준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구에 대한 자부심을 강하게 느끼지만 경계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양쪽 문화와 서비스를 모두 체험하면서도 어딘가 애매한 정체성을 갖게 된다. 예컨대 “우리 집은 주소상으로는 관악구지만 사실상 생활권은 서초구다”라는 식이다. 결국 경계선 위의 삶은 지도 위의 선이 어떻게 사람들의 정체성과 생활 패턴을 규정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2. 두 개의 생활권을 오가며 생기는 일상의 풍경
경계선 위에 사는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두 개의 생활권을 동시에 경험한다는 것이다. 출퇴근, 장보기, 아이들 교육, 여가 활동 등에서 이들은 늘 ‘어느 구에서 생활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독특한 생활 풍경이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성동구와 광진구의 경계에 사는 주민은 장을 볼 때는 광진구 전통시장을 이용하고 병원은 성동구 대형 병원을 찾는다. 집은 성동구에 있어 주민세는 성동구에 내지만 실제 생활의 절반은 광진구에서 이루어진다. 이처럼 주소지와 생활권의 괴리는 경계 지역 주민들에게 흔한 현상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경계 생활이 때로는 주민들에게 장점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두 개 구의 장단점을 모두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집은 강북구에 두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주거 비용을 누리면서도 마포구 생활권을 이용해 문화적 인프라를 향유하는 경우가 있다. 또는 노원구 주민이 도보로 바로 옆 도봉구 공원을 즐기는 것처럼 생활 반경이 행정 구역을 가로질러 확장되는 것이다.
하지만 불편함도 많다. 구마다 다른 규제로 인해 쓰레기봉투를 사는 곳이 다르고 도서관 회원증을 따로 만들어야 하며 주차장 사용이나 문화센터 등록에서도 제약이 따른다. 경계선 한쪽에서는 받을 수 있는 혜택이 다른 쪽에서는 받을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로 인해 주민들은 “구청이 아니라 생활권 기준으로 행정 서비스를 묶어야 한다”는 요구를 내놓기도 한다.
이렇듯 경계선 위의 일상은 불편함과 편리함이 공존한다. 주민들은 늘 ‘양쪽을 오가는 사람’으로서 살아가며 그 과정에서 다른 구 주민들과의 네트워크를 자연스럽게 형성하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는 경계선 위의 삶이야말로 도시가 가진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생활 구조를 가장 잘 보여주는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3. 경계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도시 문화와 정체성
도시의 경계선은 단순한 행정 구분을 넘어서 독특한 문화와 정체성을 형성하기도 한다. 경계 지역은 종종 두 구의 특성이 혼합되어 독자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마포구와 은평구의 경계 지역은 전통적인 주거지와 젊은 세대의 문화 공간이 섞여 독특한 카페 거리와 생활 문화를 만들어냈다. 구와 구의 접경지라는 특수성이 새로운 도시적 창의성을 낳은 것이다.
또한 경계선 위 주민들은 두 가지 언어적, 문화적 코드를 동시에 체득한다. 이는 일종의 ‘도시적 이중언어’와 같다. 예를 들어, 성북구와 동대문구 경계에 사는 주민은 성북구 주민센터 프로그램에도 익숙하지만 동대문구 전통시장 문화에도 익숙하다. 이 과정에서 경계 주민들은 한쪽 구에만 속한 사람들보다 더 넓은 사회적 경험을 쌓게 된다. 이는 경계가 단절이 아니라 연결의 가능성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경계 정체성은 부동산 시장에도 반영된다. 어떤 아파트 단지는 공식적으로는 ‘동작구 ○○동’이지만, 사실상 생활권은 서초구에 속해 있기 때문에 ‘강남 접근성이 좋은 집’으로 홍보된다. 행정 경계와 생활 경계가 엇갈리면서 부동산 가치까지 달라지는 것이다.
현대 도시에서는 경계 지역이 새로운 문화 창출의 장으로 변모하고 있다. 예컨대 서울의 일부 경계 지역은 젊은 예술가들이 작업실을 마련하거나 지역 축제가 열리며 두 구 주민이 자연스럽게 섞이는 공간으로 발전한다. 이는 행정 구역의 선이 가진 경직성을 생활 속에서 유연하게 넘나드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결국 구와 구 사이, 경계선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은 도시의 복잡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삶의 방식이다. 지도 위에 단순히 그어진 선이 실제로는 수많은 제도와 기억, 문화와 생활을 만들어내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불편함과 가능성을 동시에 경험한다. 경계는 우리를 나누지만 동시에 새로운 만남과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도시의 창조적 공간이기도 하다.